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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ㆍ입체적’ 악역의 매력과 사회적 성찰

by moomoobba 2025. 9. 4.

드라마 '마우스' 관련 이미지

한국 드라마에서 악역은 단순한 권선징악 구도를 넘어서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빌런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일차원적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2020년대 이후 드라마 속 악역들은 복잡한 사연과 내적 갈등, 사회적 맥락을 지닌 다층적·입체적 빌런으로 묘사되면서 시청자들에게 동정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비밀의 숲’의 이창준(유재명 분), ‘펜트하우스’의 천서진(김소연 분), ‘마우스’의 정바름(이승기 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속 범죄자들은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악역이 모든 인간의 어두운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다층적·입체적 악역의 등장은 한국 드라마의 서사를 깊이 있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됐고,  시청자들에게는 단순한 카타르시스 이상의 성찰을 제공합니다.

복잡한 서사를 이끄는 빌런

드라마 ‘비밀의 숲’은 한국 드라마에서 ‘빌런의 다층성’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대표작입니다. 극 중 이창준은 처음에는 권력에 취한 전형적인 부패 검사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권력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하는 인물임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선택이 개인적 욕망인지 조직을 위한 희생인지조차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시청자들에게 단순히 “악하다”라는 도식을 넘어 그가 왜 그런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서동재(이준혁 분)도 표면적으로는 권력에 아부하는 전형적인 검사처럼 보이지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담긴 캐릭터입니다. 드라마는 서동재의 비겁함을 조롱하는 동시에 그 비겁함조차 인간이 가진 생존 본능의 한 단면으로 그려냅니다. 이처럼 ‘비밀의 숲’의 악역들은 단순히 주인공의 적대자가 아니라 권력과 조직의 모순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통해 극의 깊이를 배가시킵니다. 시청자들이 이창준의 죽음에서 단순한 해방감 대신 복잡한 감정을 느낀 것은 해당 캐릭터가 가진 다층성 때문입니다. 그는 악인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였고,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동시에 소모품이었습니다. 이러한 빌런의 서사적 위치는 ‘비밀의 숲’이 단순한 범죄극을 넘어선 사회파 드라마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욕망과 상처가 뒤섞인 악역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한국 드라마에서 다층적·입체적 빌런의 진화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입니다. 드라마 속 천서진과 주단태(엄기준 분)는 전형적인 악인이지만, 그들의 욕망과 폭력 뒤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결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서진은 끊임없는 성공 욕망과 사회적 인정에 집착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압박과 불안, ‘완벽해야만 사랑받는다’는 왜곡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악행은 결코 용납될 수 없지만, 시청자들은 동시에 그녀의 사회적·가정적 환경에도 주목하게 됩니다. 주단태 역시 단순히 탐욕스러운 빌런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계급 상승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지닌 인물이자 동시에 어린 시절의 가난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선택한 인물입니다. 드라마는 그를 절대적인 악으로 그리면서도 그가 사회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괴물임을 드러냅니다. 이런 복합성은 시청자들에게 인간의 욕망과 불안이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우리 안의 어두운 면을 직면하게 만듭니다. ‘펜트하우스’의 악역들이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면서도 동시에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계급 갈등, 부의 세습, 교육 열망, 인정 욕구가 과장된 형태로 드러났고, 그 속에서 시청자들은 분노와 동정을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천서진이 무너질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녀가 망가지는 모습에서 묘한 슬픔을 느낀 이유는 바로 이 다층성에 있습니다.

악인의 심리를 해부하다

드라마 ‘마우스’는 악인이 타고나는 건지 아니면 만들어지는 건지를 직접적으로 묻는 작품입니다. 정바름은 처음에는 착하고 순박한 경찰로 등장하지만, 그가 사실은 연쇄살인마의 본성을 지닌 인물임이 밝혀지며 충격을 줍니다. 그의 양면성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선한 환경이 주어지면 악은 사라질 수 있나’, ‘타고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나’ 같은 질문은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선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정바름은 끔찍한 범죄자이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한 면모도 가진 인물이고, 시청자들은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혼란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악인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다층적·입체적 악역의 개념을 극한까지 확장시킨 셈입니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실제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빌런의 내면 심리를 사실적으로 다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드라마는 범죄자를 괴물로 묘사하는 대신 그들의 성장 배경, 사회적 소외, 심리적 왜곡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악행이 특정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구조적 요인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들 두 작품은 모두 악역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빌런이 단순한 대립각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층적·입체적 악역이 남기는 성찰

한국 드라마의 악역은 더 이상 단순한 악인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비밀의 숲’의 이창준은 권력 구조 속에서 소모되는 인간의 비극을, ‘펜트하우스’의 천서진과 주단태는 욕망과 결핍이 빚어내는 괴물성을, ‘마우스’의 정바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 본성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낸 범죄의 맥락을 각각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악역이 단순히 주인공의 방해물이 아니라 작품의 메시지를 강화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입니다. 다층적·입체적 악역의 등장은 드라마를 더 깊이 있고 설득력 있게 만듭니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악행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가진 상처와 모순에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며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넘어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한국 드라마가 다층적·입체적 악역을 더욱 정교하게 다룰수록 이야기는 한층 풍부해지고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