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한국 드라마는 전통적인 선한 주인공을 앞세우지 않고,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갈등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다크 히어로’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장르적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불신과 현실의 모순을 반영함으로써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새로운 트렌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크 히어로가 부상하게 된 배경, 주요 드라마의 실제 사례, 시청자 반응과 문화적 의미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다크 히어로의 부상 배경
한국 드라마에서 다크 히어로의 부상은 단순한 캐릭터 유행이 아니라 산업·문화·사회적 전환의 결과입니다. 첫째, 플랫폼의 변화가 촉매제의 역할을 했습니다. OTT 중심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시청자 이탈을 막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전통 지상파의 검열과 관성에서 벗어난 과감한 캐릭터 실험이 가능해졌고, 회색지대에 선 주인공이 유효한 대안이 되었습니다. 둘째, 현실 체감형 분노가 장르를 밀어올렸습니다. 반복되는 권력형 비리, 약자 대상 강력범죄, 법과 제도의 허점에 대한 피로가 쌓이며 ‘절차적 정의’만으로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제도 밖 응징, 즉 다크 히어로의 ‘비합법적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글로벌 시청자 취향과의 접점을 확대한 결과입니다. 넷플릭스·디즈니+·티빙 등 글로벌 OTT를 통한 드라마의 전 세계 동시 유통은 국가별 윤리 코드의 차이를 상쇄하고, 보편적으로 통하는 복수·응징 서사에 한국적 디테일을 덧씌우는 전략을 가능케 했습니다. 드라마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콘실리에리였던 주인공 빈센조(송중기 분)가 한국 대기업의 탐욕과 결탁한 범죄 구조를 ‘악으로 악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폭력과 기만, 법 기술을 동원하지만 결코 인간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촌철살인의 블랙코미디, 스타일리시한 연출, 리듬감 넘치는 대사가 결합해 ‘부정의를 덮는 법’이라는 문법을 역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드라마 ‘모범택시’는 무지개운수 임직원들이 피해자의 의뢰를 받아 은밀히 복수를 수행하는데,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에피소드로 현실감을 높였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물리적·심리적 응징의 수위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전체적인 극의 흐름을 피해 회복의 상징적 의식처럼 연출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희석시켰습니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프로파일러가 연쇄살인의 어둠을 추적하며 ‘괴물의 마음을 이해해야 잡을 수 있다’는 역설을 극대화했습니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범죄자들을 더 큰 악을 잡기 위한 도구로 쓰는 내용인데, 그 자체가 법·윤리의 경계가 희미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드라마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있다는 징표일 수 있습니다. 다크 히어로는 불완전한 제도와 감정적 정의 사이의 긴장을 드라마의 문법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크 히어로의 부상은 사실상 한국 사회의 도덕적 피로·정치적 냉소·공동체 신뢰 위기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다크 히어로의 성장과 갈등
다크 히어로의 생명력은 ‘수단의 과격함’이 아니라 ‘성장의 궤적’에 있습니다. 그 성장은 윤리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상처의 인식과 경계의 조율 과정에 가깝습니다. 드라마 ‘빈센조’의 주인공은 처음엔 조직적 효율과 생존 본능에 충실한 실용주의자였지만, 금가프라자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만나 법·제도의 허점으로 인한 그들의 고통을 마주하며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물론 폭력 자체가 줄지는 않지만, 폭력의 대상과 방식은 변합니다. 냉혈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책임으로 이동하는 정서의 축이 성장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더 나쁜 악’을 물리치기 위해 ‘덜 나쁜 악’이 되고자 할 뿐 ‘좋은 영웅’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전략적으로 배치했다는 평가가 가능합니다. 드라마 ‘모범택시’의 주인공 김도기가 생각하는 정의의 관념에는 군대에서 겪은 트라우마와 가족사의 비극이 투영돼 있습니다. 그는 복수의 수위·절차·사후 회복을 두고 동료들과 반복적으로 충돌합니다. 이 갈등은 팀의 안전 확보,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 응징의 지속 가능성 같은 운영 원칙으로 귀결되는데, 그 핵심은 ‘사적 보복’에서 ‘사적 복권(회복 정의)’으로의 중심이동입니다. ‘내가 시원한가’가 아니라 ‘피해자의 삶이 회복되는가’로 질문을 바꾸면서 주인공도 함께 성장한 것입니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프로파일러(김남길 분)는 다른 결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그는 범죄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자기 내부의 균열을 자각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공감의 과잉으로 힘들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감의 결핍에 따른 수사의 무뎌짐도 의식합니다. 그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공감의 강약 조절, 팀 내 신뢰 구축, 피해자 유족과의 정서적 유대 등을 체득합니다. 이 성장선은 ‘악을 물리치는 기술’보다 ‘악을 마주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체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경찰과 범죄자들의 협업은 전형적 회색지대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불신하면서도 더 큰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규칙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죄를 마주하고 처벌·속죄·기여의 비율을 조정합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성장은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팀의 프로토콜인 내부 규범을 재구성하면서 개인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시청자 반응과 문화적 의미
다크 히어로의 가장 큰 매력은 ‘경계 위를 걷는 스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경계는 법과 정의, 공공선과 사적 복수, 인간성과 괴물성 등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합니다. 드라마 ‘빈센조’는 법을 무력화하는 거대 자본의 기술을 거꾸로 이용해 반(反)법치의 정의를 구현합니다. 시청자들은 법 절차 파괴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제도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면 규범을 준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반문하게 됩니다. 드라마 ‘모범택시’는 피해자 중심 정의의 급진적 해석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형벌’인지 ‘복수’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시청자들은 응징의 비례성, 절차적 통제의 필요성, 피해자 회복의 우선순위 등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시원함’과 ‘정당성’ 사이의 미세한 간극이 드라마의 긴장을 지속시키는 셈입니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경계를 내부화한 작품입니다. 범죄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범죄에 공감하는 듯한 죄책감으로 전이되는 ‘개인의 어둠’을 공동체의 규칙으로 견디게 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법이 감당 못 할 악을 제거하기 위해 법을 우회하는 선택이 정당한지를 묻는데, 시청자들은 선뜻 박수만 칠 수는 없는 다소 어정쩡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다크 히어로의 문화적 함의는 분명합니다. 첫째, 한국 사회의 신뢰 위기를 웅변합니다. 사법·정치·미디어에 대한 사회적 피로가 드라마를 통해 반사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드라마들은 폭력의 중독성을 경계합니다. 더 강한 응징이 아니라 응징을 줄이는 기준을 의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글로벌 포지셔닝에서 다크 히어로는 K-드라마의 서사 깊이를 증명합니다. 단순 유혈극이 아닌, 윤리적 난제를 템포와 미장센, 음악과 대사로 정교하게 가공하는 제작 역량이 돋보입니다. 넷째, 시청자 입장에서 다크 히어로는 감정의 환기이자 성찰의 장치입니다. ‘내가 저 상황이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자기 대면을 촉발함으로써 단순히 즐기는 드라마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크 히어로는 정의의 실현을 말하지만, 그 방식으로 정의의 의미 자체를 재검토하게 만듭니다. ‘빈센조’의 전략적 폭력, ‘모범택시’의 피해자 중심 회복,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공감 조절, ‘나쁜 녀석들’의 제도 밖 협업은 각기 다른 접근으로 선악의 경계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이 회색지대 탐사를 통해 성숙한 윤리 서사를 보여주었고, 시청자들은 불편함과 카타르시스 사이에서 오래 남는 여운을 얻는 동시에 성찰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한국 드라마가 다크 히어로 서사를 통해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정체성을 구축하며, 글로벌 시청자들과 깊은 공감을 이어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