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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세계관의 확장, 시즌제 드라마

by moomoobba 2025. 8. 9.

드라마 '구미호뎐' 관련 이미지

한국 드라마는 오랜 기간 16부작 또는 20부작 완결 구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이후 시청자 취향의 다변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성장, 글로벌 시장 진출 가속화 등을 반영한 ‘시즌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시즌제는 독자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를 긴 호흡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사 구조의 심화ㆍ확장, 장르적 변주, 실험적 연출 등 파격적인 도전이 가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시즌제가 한국 드라마 산업과 서사에 가져온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즌제 드라마의 안착

‘보이스’ 시리즈(2017~2021년)는 한국에서 시즌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112 신고센터와 골든타임팀을 배경으로 ‘소리’를 단서로 범죄를 추적하는 독창적 콘셉트로 시작한 ‘보이스’ 시리즈는 시즌 1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시즌 2, 3, 4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시리즈는 영화 전문채널로 시작해 드라마에까지 영역을 넓힌 OCN에서 시즌 1이 6%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습니다. 시즌 1은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웰메이드 범죄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시즌제의 핵심 전략은 매 시즌마다 새로운 사건과 강력한 악역을 도입하되 콘셉트와 극의 톤을 세밀하게 변주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이스’는 시즌 1에서 충격적이고 강렬한 범죄 묘사와 골든타임의 압박감을 전면에 내세워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인 데 이어 시즌 2, 3, 4에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골든타임이라는 요소는 유지한 가운데 해외 범죄, 조직적 음모, 심리전 등 범죄의 유형을 다양화하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붙잡았습니다. 또 주인공을 포함해 캐스팅의 변동 폭이 다소 컸지만, 플래시백ㆍ회상ㆍ교차편집 등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기존 팬들의 충성도를 유지한 가운데 새로운 시청자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절대 청감’ 능력을 지닌 주인공과 강력계 형사들의 개인사(애도, 복수, 사명감)가 매 시즌마다 층위를 더해간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이처럼 ‘보이스’는 장르물에서 시즌제가 어떻게 ‘콘셉트의 지속성과 변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다만 시즌 1, 2가 기록적인 시청률을 보인 데 비해 시즌 3, 4의 성적표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범죄 드라마의 근본적 한계인 비슷한 패턴의 극 전개가 독창적 설정이라는 매력을 가린 측면이 있습니다. 시즌 5 제작이 현실화한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주목됩니다.

생활밀착형 시즌제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2021)은 생활밀착형 시즌제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크게는 의료 드라마의 틀을 취하고 있지만, 극을 이끄는 중심은 20년 지기 친구들의 우정과 일상입니다. 에피소드마다 환자들의 사연을 담았지만, 이 역시 의사인 주인공들의 직업적 일상과 어우러집니다. 여기에 더해 시즌 1의 서사가 시즌 2에서 이어지는 구조를 택함으로써 전체 드라마의 연속성을 유지했습니다.

이 드라마는 특히 시즌 1과 시즌 2에서 각 인물의 미세한 심리 변화, 직업적 갈등, 가족 문제, 사랑의 진화 등을 천천히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극을 전개했습니다. 또 주인공들의 밴드 활동, 병원 안팎에서 나누는 사소한 대화, 시간에 쫓기는 식사 장면 등 일상적 디테일에 주력함으로써 시청자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시즌 간 연출, 음악, 편집 리듬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각 시즌마다 의료계의 구조 변화, 의료인들 간 세대 갈등, 개인적 위기 등 새로운 테마를 도입해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방영된 ‘슬기로운 전공의생활’은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감안할 때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시즌 3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이유와 과정을 통해 ‘슬기로운 전공의생활’에 등장합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시즌제 도전은 소재의 다양성, 편집 기술의 진화 등을 넘어 주요 등장인물의 확장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국내 시청자들뿐 아니라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를 통해 만난 해외 시청자들로부터도 열띤 호응을 얻었습니다. 극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느리고 소소한 일상이 중심인 생활밀착형 시즌제가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다양한 장르와 세계관의 확장

시즌제는 장르의 폭을 넓히는 데에도 유리합니다. ‘검법남녀’(2018~2019)는 법의학 수사라는 전문 장르를 바탕으로 시즌제 모델을 성공적으로 구현했습니다. 시즌 1에서는 매 회 다른 사건을 다루면서 법의학적 수사 기법을 통해 진실을 파헤치는 구조를 확립했습니다. 이어 시즌 2에서는 인물 간 관계 변화와 장기 미스터리를 결합해 드라마 전체의 연속성을 확보했습니다. 이처럼 ‘사건-수사-해결’의 에피소드적 완결성과 시즌을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동시 운영은 시즌제 장르물의 고전적 강점입니다. 이는 시즌제의 필수 조건 중 하나이며, 시청자들이 다음 시즌을 기다리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판타지 장르에서도 시즌제의 가능성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구미호뎐’(2020, 2023년)은 구미호 전통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독창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를 토대로 시즌화에 성공했습니다. 특히 후속작 ‘구미호뎐 1938’은 사실상의 시즌 1인 ‘구미호뎐’에서 보여준 세계관의 시대상과 시점을 특정한 역사적 배경과 접목시키고 액션의 비중도 키움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동일한 판타지의 세계이지만 시즌 간에 시대적 배경을 이동(현대→과거)시키고 장르적 변주(로맨스 중심→액션 어드벤처)도 실험함으로써 시즌제가 ‘세계관 확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시즌제로서 세계관 확장과 장르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으며, 각 시즌마다 다른 톤과 주제를 가미해 장기적 프랜차이즈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시즌제는 단일 작품을 넘어 IP(지적재산)로서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부가 콘텐츠(스핀 오프, 웹툰, OST, 굿즈 등)로 확장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산업적 의미도 큽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즌제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의 제작 방식과 서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시즌제 드라마는 장르물(‘보이스’)에서 시작해 생활밀착형(‘슬기로운 의사생활’)으로 확장됐고, 세계관을 변주하는 다양한 실험(‘검법남녀’와 ‘구미호뎐’)으로 이어졌습니다. 시즌제의 확산은 시청자 소비 패턴의 변화, OTT 플랫폼의 요구,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기획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시즌제는 스토리의 깊이와 인물의 입체성을 강화하고, 장기 팬덤을 형성하며 IP로서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구조적 장점을 제공합니다.

다만 성공적인 시즌제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제작 환경, 배우ㆍ제작진과의 장기 계약, 효율적인 시즌 간 일정 관리 시스템, 매 시즌 완결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기획력 등이 필수입니다. 시즌제는 단순히 후속작을 제작하는 수준을 넘어 독창적인 세계관을 확장ㆍ심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장르와 다양한 포맷의 시즌제 실험이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